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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기의 환자

램/양병석 옮김


<전략> 병에 걸린다는 것은 군주의 대권(大權)을 향유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비교해 보라 ―― 조심스런 그 발걸음, 눈짓 하나로도 대령하던 공손한 그 시중과, 병세가 호전되었을 때 동일한 간호원이 취하는 부주의한 그 행동(문을 쳐 닫거나 열어 놓는등), 함부로 병실을 출입하는 그 불손을 ―― 그러면 병실의 침대(차라리 왕좌라 해 두자.)에서 회복기의 안락 의자로 옮겨 앉는다는 것은 권위로부터의 몰락이요. 왕좌로부터의 축출임을 자인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회복의 차도에 따라서 사람이 얼마나 하찮은 존재로 위축되어 버리는가! 얼마전까지만 해도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혼자서 독차지하던 그 영토는 이제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그가 누워서 전제 군주의 몽상을 실천하던 알현실(謁見室)이요, 왕권의 현장이던 그 병실이 이제 얼마나 평범한 침실로 격하되고 말았는가! 침대가 말끔히 손질되어 있는 것조차 어쩐지 하찮고 시시하게 느껴진다. 침대가 매일 정돈될 수도 있다니, 거친 파도처럼 구겨진 좀 전의 모습에 비하면 사정이 얼마나 달라졌는가! 그때는 침대 손질이란 3, 4일 만에 한번도 생각하기 어려웠다. 그 때마다 환자는 슬프고 괴로웠지만 잠시 동안 들려나와 그 달갑지 않은 청소니, 정돈이니, 하는 침범에 몸을 내맡길 수밖에 없었고, 그때마다 아귀가 어긋난 몸뚱이는 그 화(禍)를 면해 주기를 애원했었다. 그러고 나면 다시 침대로 옮겨져 3, 4일의 유예 기간 동안 몸부림치면 침대는 다시 흐트러지곤 했다. 침대 덮개에 새로 생긴 주름살 하나하나는 자세를 고쳐 누웠다든지, 억지로 돌아눕기 아니면 조금이라도 편한 자세를 취하려고 몸부림쳤던 역사의 기록이요. 쭈글쭈글해진 살갗인들 그 구겨진 침대 덮개만큼 환자의 고통을 진실하게 전하진 못했다.

그 영문 모를 한숨, 그 신음 소리, 얼마나 큰 고통이 들어 있는 동굴에서 터져 나오는 것인지 알 수 없기에 더욱 끔찍하기만 했던 그 소리들도 이제는 잠잠하다. 그 레르나의 고통도 이제 사라지고, 병고의 수수께끼도 풀려 필록테스트는 정상적인 인간이 되게 되었다.

자기 존대에 대한 환자의 몽상은, 어쩌면 가끔 찾아오는 의사나 간호원의 문안 속에서 그 흔적이 남아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들 또한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얼마나 변해 버렸는가! 이 사람이 그 사람일 수가? ―― 새로운 소식이며, 잡담이며, 이야기며, 의학과 관계없는 것이면 무엇이든 말해 주던 그 사람인가? 이 사람이 조금 전에 환자와 그의 잔인한 적인 죽음 사이에 끼여들어 조물주가 보낸 사자의 엄숙한 사명을 띤 양 높다란 중재자(仲裁者)의 위치에 우뚝 서 있던 그 사람일수가 있을까? 체! 이 사람은 어느 노파가 되어버린 것이 아닌가!

병고를 호사스러운 것으로 만들어 주었던 모든 것이 그대에게 하직을 고한다. 온 집안을 숨죽이게 했던 그 마력, 집안 구석구석 스며든 그 황량한 정적이며, 묵묵히 시중들어 주던 일, 표정만으로 문병하던 일이며, 자기만을 돌보던 보다 부드럽고 미묘한 기분이며, 세상 생각이란 철저히 배제되고 아프다는 것에만 고착된 병고에 대한 유일무이(唯一無二)한 눈이며, 온 세상이 매달렸던 인물, 그가 누렸던 그 독무대가――

한 점, 작은 티끌로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닌가!

병고의 물살이 빠져 나가기는 했지만, 건강이라는 확고한 땅에 이르기에는 아직도 먼, 회복기의 펑퍼짐한 늪 속에 들어 있을 때, 존경하는 편집자여, 당신의 원고 청탁서를 받게 되었소. '죽어가는 순간에 무슨 글이냐'고 생각했었소. 하지만, 글을 쓴다는 것이 무언가 어려운 일이요, 또 핑계가 구차스럽기는 하오만 이렇게라도 강변을 늘어놓고 나니 한결 해방이 된 기분이오. 원고 청탁이 시의(時宜)에 맞지 않기는 했지만 이 호출이 깡그리 잊고 있었던 사소한 인생사에 나를 다시 연결시켜주는 것 같소. 대단치 않은 것일지는 몰라도 이것은 활동에의 조용한 초대요, 자기도취의 터무니없는 몽상과, 병고라는 허황스런 자만 상태에서의 탈출을 뜻하는 것이었소. 사실 그런 상태에서 나는 세상에 존재하는 잡지라거나 혹은 군주 같은 존재들에 대해서, 또 법률이라거나 문학에 대해서도 무감각한 상태로 너무 오랫동안 드러누워 있었소. 이제 그 병적인 팽만한 상태도 가라앉고 있소. 또 내가 공상 속에서 차지하고 있던 ―― 환자란 오직 아프다는 골똘한 생각 하나로 풍선처럼 부풀어올라 자신을 신화 속의 티티우스와 같은 거인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니까―― 그 넓은 땅도 한 뻠으로 줄어들고 있소.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렇듯 오만한 거인이었소만, 이제 다시 내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보잘것없는 수필가인 그 여위고 깡마른 모습을 보여드리게 되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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